“기록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이 모여 반짝이는 삶이 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일기를 쭉 써왔고 나이 들어서는 시스템 다이어리로 넘어와 나중에는 제 캐릭터로 다이어리를 만들어 기록을 해왔어요. 단순히 어떤 날의 일상을 적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작은 그림들도 그때부터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그림 그리는 직업을 갖게 된 큰 동력은 이 기록하는 습관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몰라요. 그날의 감정, 그날의 공기, 그날의 온도를 그리고 적다 보면 어느새 할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그렇게 쌓인 기록들은 단순히 종이에만 머무르지 않고 펼쳐보면 모두 생생하게 떠올라 놀랄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종이에 무언가 그리고 적는 것을 좋아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로 작업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타블렛이 생긴 것은 디자인 회사를 하는 친구가 제게 일을 부탁하면서 준 것이었는데, 그게 전문적으로 이 일을 하게 된 시작이었죠. 종이에 그리던 그림일기는 인터넷 시대를 맞아 홈페이지에 연재하는 그림일기가 되었고 정말 작가가 된 후에는 작은 판 타블렛은 액정 타블렛으로 커졌습니다.
홈페이지에 그림일기들로부터 쌓인 이야기들로 첫 책을 내게 되었죠. 일상의 모든 것들이 소재였고 기록은 이야기가 되었으며 제게 타블렛은 밥을 먹고 살게 해주는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미대에 진학하고 나서 몇 년 동안 강사로 입시생을 가르치는 미술학원에 나갔어요. 입시생 친구들에게 그림을 잘 그리려면 어떻게 하느냐는 원론적인 질문을 꼭 받습니다. 그 방법이야 정말 많이 있지만 제가 꼭 이야기해주는 것 중 하나가 일상을 기록하라는 겁니다.
당연히 그림으로 기록하는 것 말입니다.
입시랑은 좀 상관없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입시생 친구들에게 꼭 해주곤 했어요. 왜냐하면 어떤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해 놓으려면 꼭 필요한 게 관찰력이거든요. 당연하게도 그 관찰력은 키우면 키울수록 정교해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그대로 그 순간을 옮기는 것이 아닌 나만의 생각이 들어가요. 그런 순간을 만나면 점점 창의력이 좋아집니다.
같은 장면을 다르게 표현하고 모두가 그리는 것과는 다른 나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네, 특별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시간이 내 그림에 입혀지게 되죠. 살아가는 모든 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감정이 파도를 타며 일과 부딪히면서 세월이 더해지면서 나만의 작업들이 점점 나의 기록이 됩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그 감정들, 그 이야기들은 그냥 물에 떠내려가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작은 돌에라도 새겨 넣어야 됩니다.
가끔은 상황을 탓하고 도구를 탓하고 이유를 만들어서 현실의 꿈을 외면할 때가 있어요. 혹시 그러고 있다면 물속에 있는 작은 돌을 주워 단 한 컷이라도, 단 한자라도 기록하세요. 당장은 그 돌이 작아 떠내려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하나 둘 쌓이다 보면 큰 물길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기록되어지는 꿈은 그렇게 물로 쓴 길 위를, 출렁이는 그 길 위를, 위태위태한 그 길 위를, 즐겁게 달릴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루는 24번의 조각이 나고 그 조각들은 또 1440번의 조각이 납니다. 그 조각들은 또 작은 조각들로 더 작은 조각들로 계속 일어나요. 저는 그 조각들을 줍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그냥 날려 버리기도 합니다.
기록하는 순간, 그 수많은 조각들 중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평범한 날이어도, 아무런 이벤트가 없고 그저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더라도 기록하기 위해 관찰하면 단 한순간, 한조각, 찰나의 그 순간을 잡게 됩니다.
오늘의 조각중, 하나만, 딱 하나만 손에 쥔다면,
마음에 담는다면, 눈에 새겨진다면,
그냥 보통의 하루가 괜찮은 보통의 하루가 됩니다.
"24년차 그림쟁이 작업루틴"
1. 일단 낮밤은 거의 바뀐 채 생활합니다. -_-;; 아무래도 늦은 밤부터 새벽시간이 작업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라 평생 이렇게 해오다 보니 습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2. 어떤 일이 있어도 (적어도) 매일 하나의 그림을 그립니다.(기록합니다) 24년 동안 눈 수술을 했던 며칠 빼고 단 하루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여행 가면 휴대용 기기나(패드류)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립니다.
3. 작업하기 전 커피를 내립니다. 좋아하는 단골 로스터리의 블렌드로 20그램, 물 온도 93도, 2분 30초에서 3분 내외.
4,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가끔은 (역시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소리만 듣습니다.
5. 작업하기 전 작업 책상을 꼭 청소합니다.
6. 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않고 다들 그렇듯 딴짓(?) 웹서핑을 하는데 그 중에서 내 그림을 홍보할 채널들은 모두 사용하고 (거의) 매일 업데이트 합니다.
7. 작업시간은 긴 편이지만 일정 시간 후에는 꼭 일어나서 스트레칭 합니다. 제 경우는 1시간이나 2시간 주기, 그림쟁이들은 특히나 작업으로 인한 고질병이 생기기 때문에 이 부분 꼭 챙겨줘야 합니다. 제 경우는 날씨만 맞으면 산책 겸 운동 1시간이 포함됩니다.
8. 작업 백업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합니다.
이 모든 반복은, 이 일이 얼마나 나에게 행복한 일인지 알게 해주는 일종의 버튼 같은 것입니다. 자신만의 행복버튼이 있어야 오래도록 이 일을 할 수 있어요. 아니 모든 일이 그렇죠. 저는 그게 기록이고, 그 기록의 반복이 쌓였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일이 좋고, 좋으니 고되도 계속할 수 있는 거죠.
오늘도 당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작업하는 모든 창작자가 행복한 반복을 했길 바랍니다.
작가 소개 및 포트폴리오 링크
글·그림·사진 정헌재(페리테일)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사진 찍고 노래 부르는 작가.
삼성생명 캐릭터 개발, 카카오톡 이모티콘 개발, 앱 개발 등 이야기를 만드는 거의 모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생활 밀착형 작가입니다. 2002년 개인 홈페이지 뻔쩜넷에서 만화와 글을 연재하기 시작, 첫 책《포엠툰》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완두콩》, 《기분 좋아져라》 시리즈, 《나는 이제 좀 행복해져야겠다》, 《잘한 것도 없는데 또, 봄을 받았다》, 《같이 살 수 있을까》,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 등 13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다음 웹툰 <기분 좋아져라>를 연재했고 최근 버프툰에서 <같이 살 수 있을까>를 완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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