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한 마음으로 계속 노를 젓는 당신에게
지금 하는 일이 아무런 성과가 없어 보이고, 퇴직금을 야금야금 까먹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며 병적인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었을 무렵, 우연히 유튜버 궤도 님이 한 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들어오니까 노를 젓는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노를 계속 젓고 있었다. 이제 물이 들어와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는 건 중요치 않다. 노를 끊임없이 젓는 행위가 중요하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약간의 위로를 받는 동시에 나쁜 의문이 불쑥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노를 계속 젓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하고요. 그만큼 그때의 저는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인생에서 가장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꿈을 위한 퇴사, 그리고 공모전 탈락
작년 초, 실력을 인정받으며 잘 다니던 대기업 웹툰 제작사를 6년 차에 관뒀습니다. 평소 과로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동료들과의 신망도 두터웠으며 나름 제 흥미와 적성에 맞는 일이었지만 회사 작품이 아닌 내 이야기와 내 그림이 담긴 작품을 하고 싶다는 목마름에 늘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퇴사할 용기가 없었던 저는 회사 생활에 안주하며 성실하게 5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디스크 내장증이라는 직업병을 얻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건강을 해치며 회사 일만 하다간 내 작품을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나온 걸 아쉬워하고 걱정했지만 저는 제 작품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퇴사하기 1년 전부터 매일 밤마다 제 웹툰을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공들여 써왔으니까요. 그렇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철석 같이 믿으며 열심히 웹툰 공모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암담했습니다. 수상을 하거나 적어도 2차 심사까지는 붙을 줄 알았던 제 웹툰은 1차 심사만에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퇴사를 꿈꾸며 1년간 열심히 준비했던 작품이었기에 상심이 말도 못하게 컸습니다. 1년간의 제 모든 노력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고, 방향을 잃은 난파선처럼 불안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떠한 비전도 가지지 못한 백수가 되었습니다. 사실 6년이나 성실히 회사를 다녔으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쉬어가도 괜찮았을테지만, 그보다 회사를 떠나서도 잘 먹고 살아가는 모습을 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도 저에게 작가의 재능이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겁쟁이의 애쓰는 나날들을 기록하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스타툰 계정을 개설했습니다.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상실감과 불안한 마음을 만화로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공모전에 수상하거나 투고하여 정식 연재 승인을 받고 나서야 세상에 작품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웹툰과 달리, 인스타툰은 언제 어디서든 그려서 올리면 반응을 심심찮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아주 적은 팔로워와 댓글이었지만 저는 금세 창작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반응과 응원에 힘입어, 내면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인스타툰으로 하나씩 그려나갔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언제나 기쁨만 있진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저조한 만화를 보면 다시 우울해 했고, 다른 인스타툰 계정의 수만 팔로워를 보며 한없이 부러워했습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까.' 제 인스타툰이 아주 보잘것없고 하찮게 느껴지는 날에는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저를 집어삼켰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그려서 올리고는 있지만, 이게 잘못된 방향이면 어떡하지?' 열심히 반대 방향으로 노를 계속 젓는 바람에, 물이 들어왔을 때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되레 후진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아마 웹툰 공모전에서 탈락한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저의 몇몇 인스타툰이 알고리즘을 타고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팔로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유입되고 많은 사람들이 제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메마른 땅에도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노를 젓는 방향이 영 틀리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물이 계속해서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잘 나아가다가도 약간 주춤하기도 하고 긴 정체기를 겪기도 하였지만, 결국 반 걸음이라도 조금씩 성장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다른 인스타툰 계정처럼 수만 팔로워를 이루진 못했지만, 이제는 제 인스타툰을 보고 여러 외주 협업 제안이 들어와 수익이 생겼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초창기 작가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기성 작가들의 업적을 부러워하며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나의 작품을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초기 임산부 뱃속의 아기집은 일주일마다 약 1센티미터씩 커진다고 합니다. 한 주 한 주를 보면 아주 미미한 변화처럼 보여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에는 어느새 태아가 자리하고 심장과 신경관을 비롯한 여러 장기가 생겨나고 머지않아 사람의 형상을 띄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창작이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사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성장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옳은 방향인지 의심하며 계속 노를 저어봅시다. 그 고민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작가 소개 및 포트폴리오 링크
지예
대기업 웹툰제작사 6년 차에 내 작품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뛰쳐나온 노답 인생.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고 표현하는 게 서툴렀던 대신, 자신의 만화를 통해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이 꿈이었다. 웹툰사에 재직하는 동안 그 꿈을 잠시 미뤄왔었지만,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렇게 부푼 꿈만 안은 백수가 되었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이 더 행복하니까.
신혼에세이툰 《겁쟁이의 애쓰는 나날들》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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