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전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누군가 제게 직업을 물을 때면 잠깐 주춤하게 됩니다. 글과 그림으로 먹고 산 지 7년 차에 접어든 프리랜서임에도, 여전히 하나의 직업으로 명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데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직업이란, 타인을 위한 라벨링의 기능이 훨씬 크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연, 미팅 등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는 다양한 자리에서 지금껏 내가 해온 일들을 일일이 읊는 것보다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여 전달하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일을 이해시키는 데 훨씬 수월할 테니까요.
알다시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프리랜서들은 더 이상 하나의 직업에 국한해 자신의 일을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운동을 하는 사람도, 심지어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도 저마다의 콘텐츠를 만들어 자유롭게 업로드하는 세상이 되었거든요. 부캐,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 N잡러 등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용어가 아닙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0년 가까이 뮤지컬 배우를 준비하다가 시작한 만화 일이 이곳저곳으로 튕겨 나가며 4권의 만화, 2권의 에세이를 출간하고, 다양한 전시 및 오프라인 강연과 클래스를 넘나들며 13만 독자들과 소통하는 인스타툰 창작자로 귀결되었으니, 이런 저의 일을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렵기도 하고 또 크게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이름 아래 묶인 제 일의 이면들을 ‘과거의 나’라는 후배 작가에게 이야기하듯 풀어보려 합니다. 막연히 그림 그리는 직업을 꿈꿨던 그 시절의 저에게,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필요한 능력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일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현실적인 정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 그 길을 고민하고 계신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의심은 루틴으로 막기
프리랜서는 ‘의심 파이터’입니다. 도처에 깔린 수많은 의심과 싸워야 해요. 특히 이제 막 시작한 갓난 프리랜서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의심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 그림을 누가 봐줄까?’, ‘이걸로 돈이 벌릴까?’, ‘이 일만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저도 처음엔 커리어가 아예 없어서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을까, 수많은 의심과 걱정을 두 어깨에 가득 짊어진 채 살았습니다. 지인의 고양이를 그려주는 대가로 받은 1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틴 적도 있어요. 수중에 돈은 없고, 커리어도 없고, 심지어 전공자라고 말하기도 애매했으니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눈에 보이는 결과물—즉, 그림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내가 가진 유일한 자산은 그림이니, 최대한 많은 자산을 쌓아놓자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림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다른 작가들의 행보를 지켜보니,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플랫폼에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업로드해 팬을 만들고, 광고를 비롯한 다양한 기회와 연결 짓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때부터 ‘주 3회 업로드’ 규칙을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그림과 만화를 꾸준히 올리기 시작했어요. 물론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일정과 업무가 정해져 있고 그걸 해내는 데 집중하다 보니 형체 없는 불안함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세 달 뒤, 팔로워 1만 명을 달성하며 본격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팬이 쌓이고 나니, 저를 필요로 하는 브랜드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의심은 루틴으로 막아야 한다’는 지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저는 원래 계획적인 성격도 아니고, 뭐든 쉽게 질리는 타입입니다. 7년 차가 되니 그 기질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회사원처럼’ 나 자신을 책상 앞에 앉혀놓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매주 월요일엔 회의를 하고, 금요일엔 한 주간의 성과를 분석해 다음 콘텐츠를 구상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예측할 수 없는 알고리즘과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외주로부터의 불안을 뒤로한 채 ‘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지치지 않고 그릴 수 있는 힘을 잃지 않는 겁니다. 의심과 불안 속에서도 나만의 루틴을 꼿꼿이 유지할 수 있다면, 10년 뒤, 20년 뒤에는 더 단단한 브랜드가 되어 있는 자신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2. 그림만 잘 그려서는 소용없다
저는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만화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전국에서 그림으로 날고 기는 친구들이 다 모여 있는 학교였습니다. 고등학생의 실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친구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들 중 지금까지 그림을 업으로 삼는 친구들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림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친구들도 있어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단순히 ‘그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떤 지점 때문이라고 느꼈습니다.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선, 자신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으면 금방 ‘낡은’ 작업이 되어버립니다. 저 또한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작업 하나하나를 올리는 것이 굉장히 망설여졌습니다. 이 그림 하나로 능력이 평가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실력이 조금 더 향상된 후에 공개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그치만 이 정도의 그림도 필요로 하는 곳이 분명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나의 작업물을 아카이빙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업로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유명 작가의 칼럼 삽화 작업이었고, 제 첫 의뢰였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확신했습니다. 작업물은 반드시 보여져야 한다고요.
계속 올리면, 누군가는 봅니다. 완벽하다고 생각한 작업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더 공개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조금은 설익어 보여도 계속해서 공개해야 합니다. 그림 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도, 작업을 하며 느낀 생각들까지도 모두 유용한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내 작업이 더 빛을 볼 수 있습니다.
3.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면 된다
이 일을 7년째 이어오고 있지만, 사실 일에 대한 깊은 사명 같은 건 없었습니다. 더 솔직해지자면, 처음엔 막연히 ‘그림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웠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말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된 지금, ‘단순히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 작업들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공개했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들에서 던져주는 기회들을 잘 붙잡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어쩌면 그런 것 같아요. 거창한 비전을 먼저 정해두는 게 아니라, 작고 예측 불가능한 기회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요리하며 조금씩 진로를 만들어가는 일.
인생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말이 있죠. 지치거나 힘들 때, 내가 가진 긍정적인 마인드와 재능을 살린다면 나만의 콘텐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프리랜서로 살아간다는 건 늘 불안과 가능성 그 사이 어딘가를 걷는 일 같습니다. 때로는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여전히 좌절하는 순간도 많은 일이지만 하루하루 쌓여가는 작업물과 루틴이 분명한 길을 만들어줄 거라고 믿으면, 그리는 일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온 지난 7년을 돌아보면, ‘직업’이라는 라벨은 결국 내가 걸어온 모든 과정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저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때로는 가르치고, 또 배웁니다. 때로는 그 어떤 라벨보다 복잡하고, 모호하고, 유동적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만—그 모든 일들을 끈질기게 이어 나가는 것. 결국 그게 ‘프리랜서’,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삶, 그 시작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멘탈을 다지는 데 정성을 기울일 것 같습니다. 오늘 또한 언제든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단단한 창작 활동을 할 내일의 나, 그리고 수많은 프리랜서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작가 소개 및 포트폴리오 링크
슌 SHUN (윤수훈)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다 스무 살에 돌연 뮤지컬을 시작했다. 군대에서 쓴 글을 모아 첫 책 《그냥이 어때서》를 출간하며 계획에 없던 작가로 데뷔했다. 계획했던 뮤지컬 배우로서의 데뷔는 무기한 연기되었지만, 쓰고 그리는 삶을 유영하다 보니 어느덧 여섯 권의 책을 출간했다. 이처럼 예측불허한 삶이 그저 순풍을 타고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필명을 ‘슌’(順, 순할 순)이라고 지었다. 지은 책으로 여행 에세이 《계획대로 될 리 없음!》, 그림 에세이 《엄마랑 떠날 수 있을 때》, 《취야진담》,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 《약한 게 아니라 슌:한 거야》가 있다.
더 많은 작업은 인스타그램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nstagram: @shunyoon @shunill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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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official.shunyo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