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의 소멸, 픽셀의 필압:
디지털 아트에서 탐색하는 인간적 실존의 영토
프레임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되는 시각문화
미술관의 풍경이 변하고 있다. 우리 미술사의 찬란한 유산들이 집결된 공간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몇 년 전 ‘디지털 실감 영상관’이 개관과 동시에 대중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고 현재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은 그 자체로 디지털아트의 존재감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백 년 전의 고전 회화인 <강산무진도>가 수만 개의 픽셀로 분해되어 광활한 벽면을 타고 흐를 때, 시각예술은 디지털이라는 날개를 달고 액자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영토를 무한히 확장한다.[1]
관람객은 더 이상 평면 비단 위의 먹을 응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제 그 강산의 기운 속에 스스로를 던져 시간과 공간이 통합된 공감각적 세계를 체험한다. 이는 단순히 ‘보기’의 문법이 바뀐 것이 아니라, 감각의 지평이 ‘머물기’의 경험으로 확장된 것이다. 시각문화가 정적인 감상이 아닌, 움직이는 활동으로 변모하는 지각 변동의 순간이다.

본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22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디지털실감영상관 개관 2주년 새로운 실감 콘텐츠 9 건 새로 공개'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보조자에서 주역으로 — 시공간을 통합하는 확장의 미학
과거 전시실 내에서 디지털은 주로 전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적 장치에 머물렀다. 작품 옆에서 작가의 인터뷰를 보여주는 작은 모니터, 혹은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들려주는 음성 도슨트 기기, 터치스크린을 활용한 간단한 교육용 체험 도구가 그 전형이었다. 디지털은 어디까지나 원본 작품의 아우라를 보좌하는 ‘설명서’ 혹은 ‘체험용 소품’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은 보조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전시의 본질이자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일본의 팀랩(teamLab)[2]이나 국내의 아르떼뮤지엄(d'strict)[3]이 보여주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제는 하나의 전시 유형이 된 몰입형 전시는 그 변화를 극명하게 증명한다. 빛과 소리, 그리고 관객의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기술은 전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감각적 생태계로 탈바꿈시킨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기술적 장관 뒤에 숨겨진 집요한 설계다. 아르떼뮤지엄의 거대한 파도가 좁은 전시장 벽면을 뚫고 나올 듯한 착시를 주는 ‘아나몰픽 일루전’ 기법은 사실 픽셀 하나하나의 왜곡률을 제작자가 수동으로 계산하고 보정하는 고도의 공정 끝에 탄생한다. 기술이 선사하는 무한한 확장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정교한 개입과 조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가상 세계의 범람 — 알고리즘의 시대, 작가의 존재론적 질문
전시의 영토가 디지털로 무한히 확장될수록, 우리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거대한 가상 세계가 우리의 실제를 대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알고리즘이 생성한 매끄러운 이미지가 작가들의 고유한 창작인 예술작품을 완벽히 대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혼란 속에서 김아영[4]과 레픽 아나돌(Refik Anadol)[5]의 작업은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김아영 작가는 AI나 기계적 생성을 그대로 노출하기보다,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3D 렌더링과 서사를 결합하여 가상 세계에 묵직한 실재감을 부여한다. 레픽 아나돌 역시 수백만 개의 데이터를 활용해 ‘데이터 조각’을 만들지만, 그 흐름의 질감과 미학적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작가의 선택이다. 알고리즘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좌표 를 잃지 않는 이들의 작업은, 기술이 예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의지가 기술을 통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디지털 캔버스 위의 장인정신 — 픽셀에 담긴 필압
시각문화의 급격한 디지털화가 상식이 되고, 창작자들이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역설적으로 수채화물감이나 색연필뿐만 아니라 디지털 펜을 쥐고 선을 긋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디지털 툴은 편리한 지름길이기 보다는, 자신의 상상 력을 구현하기 위한 수공예적 수행처이다.
전 세계적인 팬덤을 거느린 제임스 진(James Jean)[6]의 작업을 보면, 지독할 정도로 세밀한 라인 드로잉과 겹겹이 쌓인 색채 레이어는 디지털 도구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 유화 같은 밀도를 뿜어낸다. 국내의 이규태 작가[7]는 어떤가. 색연필의 아날로그적 질감을 우아하게 재현하며 빛과 공기의 흐름을 화면에 한 점씩 새겨 넣는다. 이들은 물감 대신 픽셀을 사용하지만, 펜 끝의 미세한 필압을 조절하며 화면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들의 디지털작업은 작가의 의지와 신체적 감각에 좌우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창작의 본질을 관통한다. 기술이 인간을 압도하려는 시대에, 이들이 선사하는 밀도 높은 ‘손맛’은 디지털 아트가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 실존의 영토를 증명한다.
기술적 풍요와 창작적 본질이 교차하는 가장자리, 새로운 시각문화의 시작점
큐레이터이자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디지털 아트의 현재는 기술적 풍요와 창작적 본질이 교차하는 ‘가장자리’에 서 있다. 전시의 형태는 앞으로도 무한히 확장되고 변모할 것이다. 증강현실(AR)이 일상이 되고, 가상 공간이 실제 미술관의 물리적 한계를 완전히 지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한한 공간을 채우는 진정한 좌표는 결국 창작자의 집요한 손길, 즉 ‘디지털의 수공예성’ 혹은 ‘디지털의 작가적 구현’에서 나올 것이다. 도구는 진화하고 영토는 넓어지겠지만, 그 도구를 쥐고 세계의 가장자리를 탐구하며 공감각적 몰입을 설계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대화를 끌어내는 작가의 인간성은 대체 불가능한 가치로 남을 것이다. 예술은 대화를 통한 향유를 위해 존재하기에. 기술이라는 파도 위에 닻을 내린 창작자의 손끝이, 결국 새로운 시각문화의 시작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참고 자료 및 각주]
1. 국립중앙박물관 실감 영상관: [국박 뉴스 - 디지털로 부활한 강산무진도]
2. 팀랩(teamLab) 비평: [Artnet - teamLab's Immersive Universe]
(https://news.artnet.com/art-world/teamlab-experience-tokyo-2428274)
3. 디스트릭트(d'strict) 인터뷰: [디자인프레스 - 아르떼뮤지엄의 탄생 비화]
(http://blog.naver.com/designpress2016/222123046265?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4. 김아영 작가 인터뷰: [월간미술 - 딜리버리 댄서의 구, 가상과 현실의 중첩]
5. 레픽 아나돌(Refik Anadol) 비평: [MoMA - Unsupervised: Machine Hallucinations]
(https://www.moma.org/calendar/exhibitions/5535)
6. 제임스 진(James Jean) 인터뷰: [Hypebeast - Inside the World of James Jean]
(https://www.maharam.com/stories/in-conversation-james-jean)
7. 이규태 작가 비평: [브런치 - 빛을 그리는 작가 이규태의 서정성]
(https://heypop.kr/stories/24696/)
김문성(Moonsung Kim) 작가소개
- 연구 기반 문화예술기획자
연구를 기반으로 전시와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연구와 실천을 분리하지 않고, 기획의 전 과정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다루며 문화예술 프로젝트의 맥락을 구조화하고 실행 가능한 결과로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작업 아카이브 https://brunch.co.kr/@mpriva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