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의 파도, 티셔츠의 왕이 될 수 있을까?

새 밀레니엄과 함께 초고속 인터넷·닷컴 붐이 오며 오프라인이 온라인으로 빠르게 전환됐다. 전국 어디서나 주문 가능한 쇼핑몰이 쏟아졌고, 나도 대구의 온라인 티셔츠 업체 TLOVE와 협업해 국내 최초 ‘프린트 티셔츠 페스티벌’을 열고 브랜드 ‘티왕’을 론칭했다.
페스티벌 레퍼런스는 일본 고치현 이리노 해변의 ‘T셔츠 아트전’. 현장 답사까지 갔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성남디자인센터에서 전시를 열었고, 이후 인사동으로 무대를 옮겨 수년간 이어갔다. 바닷바람은 없었지만, 티셔츠가 작품을 품은 전시는 충분히 장관이었고, 그 시기 티셔츠는 취향을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떠올랐다.
브랜드 ‘티왕’의 핵심은 멸종위기 동물 캐릭터의 이야기. 당시 스토리텔링 티셔츠는 생소했지만 온라인이 이야기 전파의 플랫폼이 되어, 상품에 담지 못한 상황별 디자인을 계속 공개하며 몰입도를 높였다. 결과적으로 인기가 커졌고, 어려워 보였던 해외 판매도 성사됐다.
[인사이트/조언]
파도에 올라타라 그리고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아라.
선명한 메시지 × 일상 아이템의 조화는 멀리 간다.
과열과 카피, 그리고 피벗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정점으로 온라인 티셔츠 브랜드들의 경쟁이 심화되고, 카피 제품들이 넘쳐나는가 하면 그저 비싸게만 팔면 특별해 보인다는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그러던 중 미국발 닷컴 버블 붕괴로 온라인 사이트만 있고 기술력이 없던 회사들이 일제히 정리되고 있었다. 온라인 관련 사업들이 줄줄이 좌초되고, 우리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티셔츠 판매는 부진했고, 티셔츠 페스티벌의 개최도 불투명해졌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온라인 티셔츠 브랜드에서 오프라인 디자인 문구 “큐몬”으로의 피벗이다.
[포인트]
리셋이 아니라 세계관의 번역, 같은 이야기를 새 그릇에 담는다.
“아동용인가요”
교보문고 핫트랙스의 첫 평가는 “아동용처럼 보인다”였다. 말로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동물 24종 × 24편 동화를 쓰고 그려 메뉴얼 북 ‘애니멀 킹덤’을 만들었다. ‘행복한 돼지가 날아다닌 이유’, ‘붉은 코끼리가 붉어진 사연’, ‘악어가 왜 검은 우산을 쓰는가’… 이야기가 어떻게 제품으로 적용되는지 과정을 문서에 담았다. 이 한 권을 들고 일본 문구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현지 샵 입점 계약을 맺었다. 그 계약서와 메뉴얼 북을 들고 다시 교보문고와 협상해 전국 매장 입점이 열렸다. 이후 텐바이텐, 1300K, 에이랜드, CGV 등 100여 매장으로 확장했다.
[실무 팁]
스토리→적용 시나리오→라인업을 문서로 보여줘라. 말보다 문서가 빨리 문을 연다.
위기 속 기회 - N서울타워 캐릭터 프로젝트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업 거래가 얼어붙던 시기, 서울타워에서 연락이 왔다. “20년 만의 리뉴얼. 새 굿즈를 함께 만들 디자인 회사 모집.” 창작자에게 전권을 준다는 희소식. 하지만 조건은 쉽지 않았다. “디자인뿐 아니라 100여 종을 상품화까지.” 결국 레드오션이 된 문구를 접고, 서울타워를 택했다.
서울타워 굿즈는 ‘N서울타워 캐릭터 디자인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캐릭터 디자인 개발에 착수한다. 지금까지 서울타워 굿즈는 서울타워의 외형을 기성 상품에 단순히 적용시킨 흔한 관광기념품이었으나, 새로운 굿즈는 서울타워를 캐릭터화 하여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나가는 컨텐츠 상품으로 기획되었다.
'스마일 서울타워' 캐릭터를 시그니처로 지류, 필기류, 잡화, 의류, 엑서사리, 오너먼트, 식품등 100여종의 디자인과 제품을 2018년까지 제작하였다. 특히 엽서는 10년 누적 합계 1000만장을 돌파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아마도 당시 서울타워를 다녀간 관광객이라면 우리 엽서 하나쯤을 있을 법했다. 넘치는 관광객들로 서울타워는 항상 북적였고, 영원히 파티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인사이트]
관광 굿즈도 IP로 확장할 수 있도록 캐릭터화 한다.
여담: 지금은 독특한 IP의 관광상품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마치 내가 개척한 것처럼 흐믓하다.
[루틴 힌트]
계절감을 잃지 않도록 이곳을 찾는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을 잊지 않는다.
메르스의 정지 버튼, 그리고 리셋

그러던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서울타워가 수개월 휴무에 들어간다. 그때 필자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 상품의 한계를 깨닫고,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만화 창작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디자인에 스토리텔링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러가 되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2018년 서울타워 굿즈 디자인 팀을 해체하고 그래픽노블 창작에 전념하게 된다.
[인사이트/조언]
외생 변수(전염병·경기)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포맷 분산과 직접 창작의 축을 준비하라.
그래픽 노블·그림책 — ‘복희’ 세계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떡볶이’와 가장 사랑하는 장르 ‘액션’을 결합해 〈복희의 레시피 – 떡볶이를 요리하는 다중인격 엄마〉를 2년간 작업했다. 떡볶이를 통해 가정 폭력 속 여성의 실존을 다루고, 폭압의 환경에서 벗어나는 법을 ‘액션 요리’로 탐색한 이야기다. 작품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독립출판 지원작으로 선정되어 2023년 출간되었다.
같은 세계관을 아동용 그림책으로 그린 〈복희의 키친 – 우주의 맛〉은 두 명의 꼬마 복희(육체/정신)가 만나 ‘조화’를 배우는 이야기로, 대교아동문학상(그림책 대상)에 선정되어 2024년 출간되었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그림책 독자들이 새로운 시각과 재미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사이트/조언]
좋아하는 것 × 잘 아는 것의 교집합에서 시작하라.
한 세계관을 연령·매체별로 번역하면 독자 접점이 넓어진다.
[루틴 힌트]
한 컷의 낙서라도 좋다. 매일 끄적인다.
4컷 카툰 〈사인〉

그림책 이후 기획한〈사인〉은 환경만화는 불편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공포·경각심 과잉을 덜고 FUN+INFO 톤으로 구성했다. 지구 환경을 다루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모순을 탐구한다. 작품은 2025년 한국콘텐츠진흥원 다양성만화 지원작에 선정되었고, 문학동네 매니지먼트와 현재 집필 중이다. 〈복희의 레시피〉, 〈복희의 키친〉, 〈사인〉의 애니메이션도 기획하고 있다.
[인사이트/조언]
메시지가 무거울수록 톤은 가볍게, 리듬은 짧게 설계하라.
[루틴 힌트]
오전 가볍게 작업, 오후 가볍게 산책 후 본격 작업 (굳어진 몸은 꼭 스트레칭으로 푼다)
지금까지 디자이너로서 디자인과 디자인 제품을 만들고, 디지털 창작자로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스토리텔링에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표류하면서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인간이 있는 한 이야기의 시대는 계속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양자컴퓨터의 시대에도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가 다시 인간을 만들 것이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 자체이기 때문이다.
To-Do(독자용)
툴은 바뀌어도, 길은 스토리가 낸다. 내일도 한 줄부터 시작하라.
작가 소개 및 포트폴리오 링크
SEHO(양세호) 작가
그래픽디자인과를 졸업 후 캐릭터 디자인으로 경력을 쌓고, 문구, 티셔츠, 관광 디자인 브랜드를 론칭하여 국내외 판매를 하였습니다. 2015년 부터 그래픽노블, 그림책, 웹툰,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창작하는 작가로 스토리텔링 작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콘텐츠진흥원 다양상 만화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환경만화 <사인>을 출판사 문학동네의 매니지먼트로 작업하고 있고, 브런치 플래폼에서 <복희의 떡볶이> <왔따맨> <호야사진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 캐릭터 디자인 <국찐이빵>, 문구브랜드 <큐몬>, 티셔츠브랜드 <티왕>
- 관광브랜드 <n서울타워>, 그래픽노블 <복희의 레시피>, 그림책 <복희의 키친>
- 디지털애니메이션 <도어>, <복희의 키친>등의 디자인 & 출간 작품이 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yangseho
E-mail: bumper21@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