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거 그려서 오랫동안 살아남기
안녕하세요. 2002년부터 온라인에서 타블렛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그림에 글을 얹어 13권을 책을 내고 2025년에 도착한, 와콤 타블렛으로 24년째 밥을 지어(?) 먹고 살고 있는, 만화 그리고 글 쓰는 페리테일이라고 합니다. 꽤 오랜 시간이죠? 저도 사실 이렇게 오래 그릴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보니 당연히 꿈이 만화가였고 운이 좋아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득한 시간들인데 어떻게 긴 시간 그림 그리며 먹고 살기가 지속가능 했을까 생각해보다 첫 글을 씁니다.
돈이 되는 그림과 돈이 되지 않는 그림이 있습니다. 우린 모두 생활인들이니 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요. 특히나 지속가능한 창작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해요. 프리랜서가 되면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의뢰받은 작업은 상관없는데, '내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 모호한 순간을 돌파하는 방법은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의뢰받지 않은 그림은 당장은 돈이 되지 않는 그림이지만 글을 얹고 사진이 올라가고 이야기가 붙어 책이 되거나 다른 어떤 작업으로 이어진다면 그 그림은 그때부터는 돈이 되는 그림으로 변하거든요. 그 순간이 언제 올지는 몰라요. 그게 핵심입니다. '때'기다리는 것. 제가 저 위에 '밥짓는 타블렛'이라 쓴 게 그 뜻이기도 합니다. 그림이라는 게 뜸을 들여야 하거든요.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일이 전업이 된 후 매년 ‘살아남기’는 제게 큰 화두였습니다. 한 권, 두 권 책을 내면서 이 일을 한 20년쯤 한다면 좋겠다 싶었는데 정말로 20년을 지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가졌던 ‘살아남았다’의 기준은 제 그림을 누군가 사준다는 것이었고 가장 최근에도 제 그림을 팔았으니 그 기준으로 본다면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2002년의 첫 책으로부터 20년이 지나 열세 번째 책까지 그동안 쓰고 그렸던 이야기들이 살아온 시간만큼 쌓였습니다. 어떤 그림은 돈이 되었고 어떤 그림은 돈이 되지 못했습니다. 의도한 대로 흘러간 것도 있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사이 저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실패하고 성공하기를 반복했습니다. 20년 동안 수없이 달라졌지만 단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계속 ‘귀여운 것’을 그리고 있다는 것. 계속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2년 차에는 이런 생각을 해도 쓸 수 없을 말이지만 20년을 하니까 쓸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아!! 계속하면 살아남는구나. 좋아하는 일은 계속할 수 있구나'
물론 20년을 한다고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불안에 잠겨 가라앉지 않고 불안의 파도를 타며 항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불안의 파도 위에서 귀여운 것을 그렸더니 어느새 20년이 지나버렸습니다. 저는 귀엽지 않지만(-_-;;) 그림이라도 귀여운 것을 그려서 제 삶이 좀 귀여워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나를 먹고 살게 해주도록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 그립니다.
여기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가 더 나옵니다.
'나는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아주 원초적인 질문인데 저는 이 질문은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자신에게 한번은 물어본다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 얘기하고 누군가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로 말합니다. 두가지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해요. 그저 자신에게 맞는 선택지가 있을 뿐입니다. 당장에 돈이 되지 않아도 나는 밤새 그림 그리는 게 좋아.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일년이든 지치지 않고 싫증나지 않고 이 일이 좋다면, 직업으로 삼는 겁니다. 지속가능함의 첫번째는 '좋아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계속하게 되고 계속하게 되면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면 어느 순간 '때'를 만나 눈에 띄게 되거든요.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을 늘어놓으세요.
진심을 담고 그렇게 거창한 거 필요 없습니다.
찾았다 싶으면 그냥 하세요.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면 돈이 되는 그림을 그리세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세요.
제안을 하고 투고를 하고 온라인에 그림을 전시하세요.
떨어지면 어쩌죠? 거절당하면...어떡하죠?
그러면 아직 '때' 안된 거라 생각하고 계속 가세요.
결국 지속 가능함의 원천은 '당신'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무엇까지 감내할 수 있나…. 그것을 알게 되고 알아가는 과정으로부터 당신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당신은 지금 몇 페이지쯤 그렸을까요?
어떤 이는 아직 표지도 그리지 않아서 막막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중간쯤 그렸는데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책이 몇 페이지 짜리로 완성될지는 모르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언제든지 다시 쓰고 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요.
나만이 알고 있을 뿐이죠.
빨리 책을 덮었거나 혹은 보여주기가 창피해 찢어버렸거나. 그렇다 해도 언제든지 다시 펼치고, 새로운 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요즘은 더 쉬워졌잖아요. ‘Ctrl+z’누르면 언제든지 다시 선을 그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나의 불안을 토닥이고 응원하며 당신의 그림으로 5년, 10년, 20년, 더 오래도록 그려지길 기원합니다.
작가 소개 및 포트폴리오 링크
글·그림·사진 정헌재(페리테일)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사진 찍고 노래 부르는 작가.
삼성생명 캐릭터 개발, 카카오톡 이모티콘 개발, 앱 개발 등 이야기를 만드는 거의 모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생활 밀착형 작가입니다. 2002년 개인 홈페이지 뻔쩜넷에서 만화와 글을 연재하기 시작, 첫 책《포엠툰》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완두콩》, 《기분 좋아져라》 시리즈, 《나는 이제 좀 행복해져야겠다》, 《잘한 것도 없는데 또, 봄을 받았다》, 《같이 살 수 있을까》, 《귀여운 거 그려서 20년 살아남았습니다》 등 13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다음 웹툰 <기분 좋아져라>를 연재했고 최근 버프툰에서 <같이 살 수 있을까>를 완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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